[무장 독립 투쟁]
국내에서도 1919년 천마산대, 1920년 보합단, 1920년 구월산대 등이 만주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무장 항일 투쟁을 이어 나갔다.
국외에서는 3.1 운동을 계기로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되었다. 북간도(북만주)에 대한 독립군(홍범도, 1919), 북로 군정서군(김좌진, 대한 정의단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고를 받고 북로 군정서로 개칭하였다.), 국민회군(안무, 1919), 군무도독부군(최진동, 1919)가 조직되었다. 서간도(남만주)에는 서로 군정서군(이상룡, 1919), 대한 독립단(박장호, 1919), 광복군 사령부(조병준, 1920),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이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하였다. 독립군이 삼둔자 전투에서 일본 헌병 순찰대를 공격하자,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을 기습 공격하여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으나, 독립군 연합 부대에 패배하였다. 이후 일본은 봉오동 전투에 보복하기 위해 만주로 진입할 구실을 찾다가, 1920년 10월 중국 마적과 내통하여 훈춘성을 공격하게 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일본인을 지킨다는 핑계로 북간도 지역으로 일본군을 파병하였다. 이 군대들로 조선인을 총살하고 불태우는 등 대학살을 저질렀다.
일본군들이 만주로 들어오자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에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부대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6일간 10여 차례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대승을 거둔 것을 ‘청산리 전투’라 한다.
거듭되는 패배에 일본은 보복을 위해 1920년 10월 ‘간도 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과 학교, 교회를 불태웠다. 이로 인해 간도 지역 한인 사회가 초토화되고, 독립군들은 일제를 피해 러시아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동 중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의 독립군이 소련과 중국의 국경 지대인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서일의 주도 하에 ‘대한 독립 군단’을 편성하여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이 대한 독립 군단과 각지의 한인 무장 부대들이 소련 적색군의 지원 약속에 속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는데, 소련 적색군과 백색군의 내전에 참전하여 이용당하였다. 와중에 독립군 지휘권을 두고 박일리아의 상하이파 공산단(대한 의용군)과 오하묵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고려 혁명군)으로 대립하였다.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적색군이 한인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자유 대대)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상하이파 공산당(사할린 의용대)를 공격하였고, 1921년 많은 독립군이 희생당하는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이 일어났다. 때문에 독립군 세력은 와해되었다.
1922년 북만주 일대에서 대한 독립 군단이 재결성되었다. 또한, 자유시 참변 이후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단이 통합하여 1922년 통군부를 조직하였고, 이를 ‘대한 통의부’로 확대하여 중앙 조직과 지방 행정 조직을 갖추었지만, 내부에서 공화주의와 복벽주의로 대립하여 다시 통의부와 의군부로 분열하였다. 대한 통의부가 해체되고, 1923년 이곳에서 탈퇴한 백광운을 중심으로 임시 정부 산하의 육군 주만 ‘참의부’가 조직되었다. 참의부에 참여하지 않은 대한 통의부의 사람들은 오동진을 중심으로 1924년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1925년 대한 독립 군단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결성되면서, 3부 체제가 형성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독립군들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만주 군벌(장쭤린)과 ‘미쓰야 협정’(총독부 경무국장 이름이 미쓰야)을 맺었다. 1927년 이로 인해 3부 간부가 체포되고, 만주의 한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한편 3부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원으로, 1926년 정의부 중심의 3부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의견 분열로 대립하다가 1929년 해체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1928년 북만주에 김좌진, 지청천, 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혁신 의회’가 조직되어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결성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김구가 조직한 한국독립당과 다르다!) 또한 1929년 남만주에 양세봉을 중심으로 ‘국민부’가 조직되어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결성하였다.
1931년, 일본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 사변으로 만주국을 수립하자, 한중 연합 전성이 형성되었다.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중국 호로군과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 일대에서 중국 의용군과 영릉가, 흥경성, 신개령, 통화련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935년, 유일당 운동의 일원으로,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 여러 단체가 결합하여 ‘민족 혁명당’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1937년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 계통만 남고 지청천, 조소앙 등의 우파 인사들이 탈퇴하였고, 남은 세력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1937년 이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이 조직되었고, 1938년 산하에 개설된 ‘조선 의용대’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이어갔다.
1935년 김구와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한국 국민당’이 창당되었고, 중일 전쟁 이후 1937년 민족 혁명당에서 탈퇴한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과 연합하여 민족주의계인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광복전선)’를 결성하였다. 이에 참여하지 않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 등이 모여 사회주의계인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1939년, 이 두 연맹이 제휴하여 전국 연합 진선 협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940년에는 민족주의 계열인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이 통합되어 ‘한국 독립당’이 창당되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충칭에 정착하였다. 곧이어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고,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1지대가 여기에 합류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영국군과 연합하여 미얀마, 인도 전선에 파견되었으며, 1945년 미국 전략 정보국(OSS) 의 도움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조선 의용대 2지대 (화북 지대)는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되었고, 1942년 김두봉 중심의 조선 독립 동맹 산하의 군사 조직이 되었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태항산 전투를 수행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해방 후엔 중국 국공 내전에 참여하고 북한 인민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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