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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Korean history

[공무원 한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열단

by ststeady 2020. 4. 13.

[대한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 직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는 대한 국민 의회(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신한 청년당 중심, 국무총리 이승만), 국내에는 한성 정부(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가 있었다. 4월 신한 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 의정원이 구성되었으며, 11일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임시의정원을 주체로 하여, 1919911, 본부를 상하이로 하고, 임시 의정원(입법부), 국무원(행정부), 법원(사법부)3권 분립 체제를 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임시정부는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와 통신 기관인 통신국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에 이륭양행,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위장 회사를 세웠다. 이를 거쳐 애국 공채 발행, 의연금 모집 등을 통해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였다. 서간도에 광복군 사령부(1920년 광복군 총영으로 개편되었다.), 남만주에 육군 주만 참의부를 조직하였으며, 주 파리 위원으로 신한청년단의 김규식을, 구미 위원부로 이승만을 파견하여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이광수 등이 주필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일제의 조선사 편수회에 대항하여 사료 편찬소를 설치한 후, 박은식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하였다.

1921년 연통제가, 1922년 이륭양행 교통국이 발각되어 해체되며 자금난이 가중되었다.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이 일어났으며, 외교 활동의 성과 미흡으로 비판 여론이 등장하던 차에,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청원을 제출한 것이 알려져 분노를 샀다. 이를 계기로 신채호 등 무장 독립 운동을 주장하는 세력이 국민 대표 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1923, 국민 대표 회의에 열렸으나, 김구 등 임시 정부를 옹호하는 현상 유지파는 참석하지 않았고, 임시 정부 해체와 무력 항쟁을 강조하는 박용만, 신채호 중심의 창조파와 임시 정부 존속과 실력 양성, 외교 활동을 강조하는 안창호 중심의 개조파가 대립하며 회의가 결렬되었다. 이후 창조파는 소련으로 이탈하여 임시 정부의 분열이 심해졌다.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추대하였으나 4개월만에 병사하고, 대통령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였다. (1차 개헌은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한 것이었고, 2차 개헌이 국무령 중심 내각 책임제로 개각한 것이다.) 1927년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1940년 주석 중심 체제로, 1944년 주석, 부주석 체제로 개헌하였다.

김구는 침체된 임시 정부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193112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2,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는데, 이때 중국 신문이 안타깝게도 일본 국왕이 죽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보도하여, 일제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 일본이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던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성들에 중상을 입혔다. 이를 계기로 19317월 만보산 사건으로 틀어졌던 중국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좋아졌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장제스)뤄양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개설하였다. 이는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1932년 이동하기 시작한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하였다. 정착 이후,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을 통합하여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

 

1919년 김원봉, 윤세주 등을 중심으로 만주 길림(지린)에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5파괴 7가살을 목표로 하고, 상하이에 비밀 폭탄 제조소를 설치하였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1920년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1922년 김익상의 일본 육군 대장 저격, 1923년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1924년 김지섭의 도쿄 궁성 이중교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인 의거 활동이다.

1923년 신채호가 의열단의 지침서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조선혁명선언에서는 무정부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며, 외교론, 자치론, 실력 양성론 등을 비판하였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론, 준비론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우리는 민중 속으로 가서 민중과 손을 맞잡아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 일제의 통치를 타도하고…’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직적 군사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노선 변화를 시도하였다. 1926년 황포 군관 학교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1932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1935년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 혁명당, 신한 독립당, 한국 독립당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된 (조선) 민족 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은 1937년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함께 항일 전쟁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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