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1912년,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은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의병과 유생으로 이루어졌으며 복벽주의와 왕정 부활을 추구하였다. 의병 전쟁을 목표로 ‘국권 반환 요구서’ 보내려고 하다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1915년, 사령 박상진, 부사령 김좌진을 중심으로 군대식 조직인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의병 출신과 신지식인들도 참여한 이 조직은 근대 공화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만주에 무관 학교를 짓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광복회 실천 강령’에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의 불법 징수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일본인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등의 내용이 있다.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기지>
서간도(남만주)의 독립군 기지는 삼원보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 1911년 이회영, 이시영 등이 설립한 최초의 자치 단체인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 1919년 한족회로 이어졌다. 1919년 한족회는 상하이 임시 정부와 연합하여 서로 군정서로 개편되었다.
또한, 1911년 이곳에 세워진 신흥 강습소는 후에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북간도의 독립군 기지는 용정과 명동에 만들어졌다. 1906년 용정에는 이상설이 서전 서숙을 세웠고, 1908년 명동에는 김약연이 명동학교를 세웠다. 이곳에 세어졌던 한민 교육회를 시작으로, 1913년 간민회, 1919년 대한 국민회가 한인 자치 단체로서 역할을 하였다. 대한 국민회는 국민회군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여 안무를 총사령으로 두고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북간도의 왕청에는 1911년 대종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중광단이 있었다. 1918년 말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이 단체는, 1919년 김좌진 중심의 북로 군정서군으로 개편되었다.
북만주에서는 이상설, 이승희 등이 밀산의 황무지를 매입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1909년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 학교를 세웠다.
중국 본토에서는 상하이와 북경 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다. 1912년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상하이에 동제사를 세웠다. 동제사의 간부인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후에 이상설과 연합하여 1915년 신한 혁명당을 세웠으며, 1917년 임시정부의 수립을 내세우며 ‘대동 단결 선언’을 제창하였다. (‘우리의 단결이 하루가 빠르면 신한의 부활은 하루가 빠르고 우리의 단결이 하루가 늦으면 신한의 건립은 하루가 늦으리니…’)
1918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독립 청원서를 미국과 파리 강화 회의(김규식 파견)에 전달하였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에도 독립운동 기지가 세워졌다. 1910년 이상설, 유인석 등이 성명회를 조직하였고, 1911년에는 권업회가 조직되어 군사 학교인 한민학교와 대전학교를 설립하였다. 권업회는 이어 1914년에는 정통령을 이상설로, 부통령을 이동휘로 하여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한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전로 한족 중앙 총회는, 1919년 대한 국민 의회로 개편되었고, 후에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미주 지역의 최초 정치 단체는 하와이에서 1903년 결성된 신민회였다. 이후 1909년 결성된 국민회를 개편하여 1910 대한인 국민회가 설립되었다. 박용만, 이승만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고 성금을 모아 임시 정부에 전달하였다. 1914년 박용만은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 위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설립하고, 1915년 국내 조직으로 조선 국민회를 두었다.
1911년 신민회가 해산된 후에,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흥사단을 조직하고, 1926년 국내 지부로 수양 동우회를 두었다.
<3.1 운동>
1917년 레닌이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고,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민족 자결주의가 대두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1918년 만주에서 ‘무오 독립 선언서(대한 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때, 국내에서는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본 독살설이 유포되고 있었고, 토지 조사 사업과 무단 통치 하의 강경한 탄압으로 저항 의식도 고조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종의 국장일을 계기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서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뒤이어 탑골 공원에 있던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도시의 상인과 노동자도 파업, 자금 제공 등의 방법으로 호응하였다.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되며 차츰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었으며, 국외의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까지도 확산되었다.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탄압을 하였으며,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이후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등의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여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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