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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Korean history

[공무원 한국사]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임오군란, 갑신정변

by ststeady 2020. 4. 6.

<개화세력과 위정척사 운동>

*개화파

-북학파에서 6,70 초반 통상개화론을 거쳐,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되었다.

 

-1860년대 초기 개화파의 주요 인물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그의 실학 사사을 계승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를 격퇴했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수 서양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을 적극 찬성하였다.

오경석은 민족 대표 33인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역관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등의 서적을 널리 소개하였다.

유홍기는 의관 출신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실패 후 행방불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에 대한 외교 방법과 개화의 속도 등을 둘러싸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온건 개화파의 대표로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이 있다. 이들은 친청의 태도로 민씨 정권과 결탁하였다. 또한 청의 양무운동을 모방하여,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고 동도 서기론에 따른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급진 개화파의 대표로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이 있다. 이들은 친일, 반청의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방하여,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고 서도 서기론에 따른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갑신정변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 개화 정책(동도서기론, 1881.01. ~ 1882. 06.)

통리기무아문(1880.12.)을 설치하고, 그 아래 12사를 두어 개화 관련 업무를 맡았다.

5군영을 장어영(수도 방위), 무위영(궁궐 숙위)2으로 통합하고, 일본인 군관을 채용하여 근대적 군사 훈련을 받는 별기군(1881.05.)을 설치하였다.

일본으로 3차례의 수신사를 보내고(11876 김기수, 21880 김홍집, 31882 박영효와 김옥균),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1881.04.,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을 보냈다.

청으로 영선사(김윤식, 1881.09.)를 파견했다.> 1883, 기기창을 설치하여 근대적 무기를 생산하였다.

미국으로 보빙사(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1883.)를 파견하였다.> 1884,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였다.

1883년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편찬하였다.

 

 

*위정척사 운동

1860년대,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이항로, 기정진 등의 통상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화의하지 말고 서양 오랑캐와 싸우자는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며, 흥선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1870년대, 운요호 사건을 배경으로,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왜양 일체론을 바탕으로 ‘5불가소를 들어 개항에 반대하였다.

1880년대, ‘조선책략의 유포를 배경으로, 이만손(영남 만인소), 홍재학(만언 척사소) 등 전국의 유생들이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0년대,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이 계기가 되어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유인석, 이소응, 문석봉 등이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오군란(1882.06.)>

-정부의 개화 정책과 외세 침략에 대한 위정척사파의 반대가 심화되었다. 구식 군인들은 군영 축소와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로 불만이 높아졌는데, 급료 미지금과 난전 단속으로 경제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일본이 강화도 조약 이후로 대량의 쌀을 일본으로 유출하여 쌀값이 폭등하였고, 이에 하층민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구식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선혜청 창고인 도봉소를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도시 하층민이 봉기에 합세하여 창덕궁까지 습격하자,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다. 대원군이 재집권하여 개화 정책을 중단하고, 별기군을 폐지하고 5군영과 삼군부를 부활시켰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다.

하지만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군이 출병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책임자로서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였다.

-일본과 배상금 지불과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는(조선 내 일본 군대의 공식적 주둔을 허용하는) 내용의 제물포 조약(1882)을 체결하게 되었다, 사죄단의 형태로 3차 수신사가 파견되었다.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는 조일수호조규 속약(1882)도 체결되었다. 일본의 요구에 따라 척화비를 철거하였다.

청은 내정 고문 마젠창과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 간섭을 심화하였으며,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켰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의 체결로, 청나라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보장하고, 치외법권과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확인하였으며, 책문, 훈춘, 의주, 회령에서 교역하도록 하였다.

 

 

 

<갑신정변(1884)>

-임오군란 이후 개화 세력이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뚜렷이 분리되었다. 민씨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한 친청 정책을 취하며 급진 개화파를 탄압하였다.

김옥균이, 입헌정치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개혁 추진을 위해, 일본에서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청프 전쟁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였다.

일본이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단행하였다. 민씨 정권의 고관을 살해하고, 고종과 민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겼다. 14개조 혁신 정강을 발표하고, 3일 천하가 이루어졌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군이 개입하면서 3일만에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다.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은 대원군의 귀국과 청에 대한 조공 폐지를 주장하며 자주 독립과 청과의 사대 관계 폐지를 주장하였다.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라며 양반 문벌 제도의 폐지와 인민 평등을 주장하였다. 지조법 개혁으로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혜상공국의 혁파로써 특권적 상업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재정하라며 국가 재정의 일원화를 주장하였다. 내시부와 규장각을 폐지하여 국왕 보좌 기관을 없애고, 대신들이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하게 함으로써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려 하였다.

 

-1884, 조선과 일본은 조선이 일본 공사관의 신축 비용을 부담한다는 내용의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1885, 청과 일본은 조선에 양국군의 공동 파병과 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텐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의 침략 경쟁이 심화되자, 정부는 러시아와의 교섭을 시도하였다.

1884, 묄렌도르프의 알선으로 러시아와 조러 통상 조약(조러 통상 장정)을 체결한 이후 러시아가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유길준과 독일 영사 부들러의 한반도 중립화론이 대두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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