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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Korean history

[공무원 한국사] 조선 중기~후기 역대 왕 업적

by ststeady 2020. 4. 4.

정조대왕

[조선 중기~후기]

 

<효종(1649~1659)>

하멜이 표류하였다.

나선정벌이 있었다.

충청과 전라로 대동법이 확대되었다.

1651, 설점수세법을 시행하였다.

1653, 양척동일법을 시행하였다.

1655,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였다.

신속이 농가집성을 편찬하였다

김육이 시헌력을 도입하였다.

1656, 유형원이 동국여지지를 편찬하였다.

 

<현종(1659~1674)>

북학론이 대두하였다.

1659, 기해예송, 1674,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1666, 함경도로 대동법이 확대되었다.

1667, 허목이 동사를 편찬하였다.

1670,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편찬하였다.

 

<숙종(1674~1720)>

1680,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유악남용 사건으로 불신을 샀는데, 서인들이 허적의 서자 허견이 모반을 꾀했다고 고하여(삼복의 변), 경신환국이 일어났다. 이후 회니시비(서인 송시열과 남인 윤휴를 중재하려던 윤선거의 사후, 아들 윤증이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묘지문을 부탁하였으나, 송시열이 무성의하게 써준 사건) 사건을 계기로,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노론(강경파)와 소론(온건파)로 분열하였다.

1689, 희빈 장씨(남인)의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1694, 서인 김춘택이 인현 왕후의 복위 운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1701, 무고의 옥 사건이 일어났다.

시전 상인에게 금난전권을 부여하였다.

1708, 경상도와 황해도로 대동법을 확대하였다.

상평통보를 널리 유통하였다

1709, 정제두가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1712,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693년과 1696년에 안용복이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경종(1720~1724)>

1721, 신축옥사가 일어났다. 1722, 임인옥사가 일어났다.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죽이려 했다며소론에 의해 처형되는 일이 발생했다. 둘을 합쳐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영조(1724~1776)>

1725, 을사환국이 일어나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728,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왕의 탕평책이 실시되었다. 1729, 기유처분을 발표하여 붕당을 타파하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골고루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영조는 탕평비, 탕평교서, 탕평채, 탕평의를 통하여 완론탕평을 실시하였다.

붕당, 사치, 음주를 3대 폐단으로 지정하였다.

산림을 부정하고, 242개를 제외하고 서원을 혁파하였다.

1741, 이조 전랑의 자천권(전랑 천대법의 완전 폐지는 정조 대이다.)과 통청권을 혁파하였다.

1746, ‘속대전을 편찬하였다.

1750,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경감하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1751,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도성을 방위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수성윤음을 발표하였다.

1760, 청계천을 정비하였다.

압슬형과 낙형을 금지하고, 삼심제를 시행하였으며, 신문고가 부활하였다.

속대전, 속오례의, 속병장도설, 무원론,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되었다.

노비종모법, 노비공감법을 시행하였다.

통청윤음하여 서얼들의 청요직 진출을 허용하였다.

나이든 선비들을 대상으로 한 기로과를 설치하였다.

1762, 임오화변(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벽파와 시파가 분열하였다.

1775, 수령수세제를 실시하였다.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보급하였다.

 

<정조(1776~1800)>

준론탕평을 실시하였다.

군주도통론과 만천명월주인옹을 주장하였다.

1776, 규장각을 설치하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능력 있는 서얼들을 등용하였다.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관리들 중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였다.

1779, 서얼차대법을 실시하였다.

1791,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1793,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내영은 한성에, 외영은 화성에 설치되었다.

1794~1796년에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수원에 대유둔전(국영농장)을 설치하고, 만석거(수리 시설) 개선을 실시하였다.

대전통편, 증보동국문헌비고, 무예도보통지, 홍재전서, 규장총목,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1791,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1791,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수령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대전통편, 일성록, 증보동국문헌비고(영조 대 동국문헌비고 개정), 무예도보통지, 동문휘고, 홍문관지, 규장각지, 탁지지, 추관지, 춘관지, 규장전운, 홍재전서 등이 편찬되었다.

벽파의 공격으로부터 시파를 보호하기 위해 문제 반정을 주장하였다.

 

<순조(1800~1834)>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다. 세도정치가 이루어졌으며,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180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황서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장용영을 혁파하고, 5군영이 부활하였다.

1801,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정약용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등을 편찬하였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편찬하였다.

이종휘가 동사를 편찬하였다.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을 편찬하였다.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편찬하였다.

김정희의 세한도와 추사체가 유행하였다.

 

<헌종(1834~1849)>

1839,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1846,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철종(1849~1863)>

1851, 신해허통으로 서얼의 청요직 진출이 허용되었다.

1860, 동학이 발생하였다.

1862,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수습을 위해 삼정이정청이 만들어졌다.

1852, 김정희의 금석과안록이 편찬되었다.

1858, 이진택의 규사가 편찬되었다.

1861,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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