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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Korean history

[공무원 한국사] 독립협회, 대한제국, 광무개혁, 간도, 독도

by ststeady 2020. 4. 8.

독도

<독립협회(1896~1898)>

서재필은 1895년 정동구락부를 통해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1896년 정부지원금을 보태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896, 근대적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자주국권(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저지, 한러은행 폐쇄, 프랑스와 독일의 광산 채굴권 저지), 자유민권(참정권 운동), 자강개혁(의회 설립 운동)을 주장하였다.

 

18983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189810월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관민 공동회(백정 박성춘의 연설이 유명하다.)에서 헌의 6를 결의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고종은 의회 설립 내용을 담은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였다.

 

하지만 보수 세력이 독립협회를 모함하기 위해 익명서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려졌으며, 황국 협회를 통해 독립협회 해체 반대 시위를 해산시켰다.

 

 

 

<대한제국(1897)>

-1896년 베베르-고무라 각서에서 일본이 친러정부를 인정하고, 을미사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1898년 로젠-니시 협정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에 가지고 있는 이권을 상호 승인하였다.

 

 

-18972,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고, 교전소(후에 독립협회파가 배제된 교정소로 바뀌고, 그곳에서 대한 제국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발표되었다.)와 사례소(역사 편찬소)를 설치하였다.

 

189710,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친 후, 환구단(원구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을미사변 때 순국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충단을 세웠다.

 

구본신참을 바탕으로 광무개혁이 실시되었다.

1897년 교전소를 설치하고, 18998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황제권을 강조하였다.

2차 갑오개혁 때 23부로 나누어진 행정 구역을 13도로 개편하였으며,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하고 풍경궁이라는 행궁을 설치하였다.

원수부를 설치하고, 시위대를 재창설하였으며, 진위대를 확대하였다.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양전 사업(양지아문)과 지계 발급(지계아문)을 하였다.

1899년 지방 영세 상인인 보부상을 지원하는 상무사를 설치하고, 근대적 회사를 설립하는 등 상공업 진흥을 위한 식산 흥업 정책을 실행하였다.

금본위제를 시도하였으나 재정부족 문제로 실패하고, 백동화만 발행하였다.

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전차, 철도 등 각종 근대 시설을 도입하였다.

1900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고, 1899년 청과 대등한 위치에서 한청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 대한제국 칙령 41호에서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를 울릉도 관할 구역에 포함시켰다.

 

 

 

<간도와 독도>

-간도

1883,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85, 87년 두 차례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에서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별개의 강이라고 끝까지 굽히지 않고 주장하였다,

1903, 이전 해에 미리 간도로 보내 우리 국민을 보호하도록 한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정식 임명하였다.

 

1907, 일본이 을사늑약 이후 간도 파출소(통감부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09,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독도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1900,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며 울릉도의 관할에 독도를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등에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1905, 러일정쟁 중, 일본은 무주지선점론을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시마네현 고시 제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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