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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Korean history

[공무원 한국사] 통일 신라 역대 왕 업적

by ststeady 2020. 3. 31.

 

석굴암

 

[통일신라]

 

<신문왕(681~692)>

681년,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의 숙청이 일어났다.

682년, 유교 정치 이념 확립을 위해 예부 소속으로 국학을 설치하였다.

안승 경주 이주 신라에 편입하였다.

687년, 관료전을 지급하고, 689년, 녹읍을 폐지하였다.

686년, 공장부와 예작부를 설치하여, 집사부 이하 14관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687년, 중대 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689년, 귀족들의 근거지인 금성(경주)를 벗어나 달구벌(대구)로의 천도를 시도하였다.

9주 5소경의 지방제도를 완성하였다. (9주에는 도독을, 5소경에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5소경은 수도가 동남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한 행정상 요지이다.)

중앙군 9서당과 지방군 10정을 편성하였다.

문무왕릉과 감은사, 만파식적 등으로 왕권이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성덕왕(702~737)>

722년,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당과의 국교를 재개하고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과와도 친교를 맺고 신라는 일본에 견일본사를, 일본은 신라에 견신라사를 파견하였다.

당에서 가져온 공자와 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안치하였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동종인 상원사 동종을 만들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 등을 지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세워졌다.

 

<경덕왕(742~765)>

한화 정책을 펼쳤다. (관직과 주현의 명칭을 중국식 한자로 바꾸었다. ‘국학’도 ‘태학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태학(감)에 박사와 조교를 설치하였다.)

757년, 귀족들의 반발로 관료전이 폐지되고 녹읍이 부활하였다.

집사부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격상시켰다.

김대성의 제안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워졌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혜공왕(765~780)>

태후인 만월 부인의 섭정으로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5묘제를 미추왕, 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경덕왕으로 정비하였다.

경덕왕 때부터 만들던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되었다.

768년, 96각간의 난(대공의 난)이 일어났다.

내물왕 후손인 김양삼이 774년 상대등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자, 친 혜공왕파인 이찬 김지정이 김양상 일파 제거를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혜공왕이 피살되었다. 이후,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올랐다. (무열왕계의 왕위세습이 끊기고, 내물왕 방계 귀족들이 득세하였다.)

태학감이 다시 국학으로 바뀌었다.

 

<선덕왕(김양삼, 780~785)>

중대의 전제 왕권에서 하대의 귀족 연립 정권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상대등이 득세하였다.

780년, 어룡성 벼슬을 개편하였다.

782년, 패강진을 개척하였다.

 

<원성왕(김경신, 785~798)>

독서삼품과(독서출신과)를 실시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주의 장관인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어 행정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소성왕(799~800)>

청주 개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삼았다.

 

<헌덕왕(809~826)>

822년, 웅천주 도독이었던 무열계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원성왕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주(공주)에 장안국을 세웠으나 진압당하였다.

825년, 김범문의 난이 있었다. 이후, 무열계 진골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헌덕왕 9년에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한 백률사 석당기를 헤웠다. (백률사는 법흥왕 때 세움, 석당은 헌덕왕이 세움.)

 

<흥덕왕(826~836)>

장보고가 산둥성에 법화원을 세우고, 당나라 서주의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828년, 장보고의 요청으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834년, 사치금지령을 내렸다.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칭하였다.

 

<문성왕(839~857)>

846년, 장보고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887~897)>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896년, 적고적의 난이 일어났다.

최치원이 시무 10조를 제안하였다.

 

<경순왕(927~935)>

후백제의 견훤에게 살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935년,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투항하였다. 경순왕이 왕건의 신하가 되면서 신라는 경주로 개칭되었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어졌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면서 고려의 사심관 제도가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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