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고려 건국 과정>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개경)으로 천도하며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연호를 천수로 바꾸었다.
북중국 5대 나라와 교류하고, 신라에 우호정책을 하였다. 고구려 계통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적대시하며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927년, 공산전투(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가 승리하였다. (견훤이 신라 침공하여 경애왕 살해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 요청 했으나 대패하였다.)
930년, 안동전투(경북 안동)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934년, 발해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935년,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이 고려로 도망하여 투항하였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투항하였다.
936년, 선산전투(일리천전투, 경북 구미 선산)에서 고려가 승리하고, 자주적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뤘다. (중국은 5대 10국 분열기였다.)
<태조(918~943)>
결혼정책, 사성정책, 중폐비사, 본관제(토성제), 역분전 등을 실행하여 호족을 포섭하는 동시에,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로 견제하였다.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취민유도(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를 위해, 조세 제도를 조정하여 세율을 수확량의 1/10으로 경감하였으며, 빈민구제기구로 흑창을 세웠다.
연호를 천수로 하였다.
관리들의 도리를 강조하기 위해 ‘정계’와 ‘계백료서’를 반포하였다.
후대 왕들이 지켜야할 정책 방안을 담은 ‘훈요 10조’를 발표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북진 정책을 실시하였다. 첫 번째로, 분사제도로 서경을 중시하였다. 두 번째로, 942년, 만부교 사건 등 거란에게 강경책을 실시하였다. 세 번째로,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개경(송악)에 법왕사, 왕륜사, 개태사, 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건립하며 숭불 정책을 펼쳤다.
<혜종(943~945)>
945년, 왕규의 난이 일어났다.
<정종(945~949)>
서경 세력인 왕식렴과 연합하여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하였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를 계획하였으나 공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947년, 청천강에 광군 30만을 편성하고, 개경에 지휘부인 광군사를 설치하였다.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서경의 입지를 강화하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광종(949~975)>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여 자주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으며, 광덕과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칭제건원)하는 내제외왕 체제를 구축하였다..
949년, 주현공부법을 실시하여 각 주현 단위로 조세와 공물의 액수를 책정하여 징수하였다.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승과제도를 실시하고, 국사와 왕사를 두었다.
958년,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960년, 자, 단, 비, 녹의 4색 공복제를 실시하였다.
962년, 중국의 송과 통교하였다.
963년, 제위보를 설치하여 빈민 구호를 실행하였다
승과(교종선, 선종선)을 실시하고, 혜거를 국사, 탄문을 왕사로 삼으면서 국사와 왕사 제도를 마련하였다. 귀법사와 홍화사를 건립하였다.
중국식 문산계를 도입하였다.
귀법사 주지인 균여는, 보살의 실천행을 강조하며 ‘보현십원가’를 저술하였다. 성상융회와 성속무애를 주창하였다. 화엄종으로 교종을 통합하였다. 법안종으로 선종을 통합하였다.
의통과 제관이 중국에 천태학을 전래하였다.
<경종(975~981)>
광종 대 숙청당했던 호족들에겐 사면령을 내리고, 광종의 개혁세력은 대거 제거하는 등, 반동 정치가 일어났다.
976년, 시정 전시과를 실시하였다. (전, 현직 관리들의 관직과 인품을 함께 고려하였다.)
<성종(981~997)>
최승로가 시무 28조와 5조 정적평을 제시하였다. (시무 28조: 외관(지방관)을 두소서. 구태여 중국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축소하여 백성이 힘을 펴게 하소서. 공신의 등제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기를 청합니다.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의 근원입니다. 양천지법을 확립하자. 전제 군주를 반대한다.) > 12목에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였다.
김심언이 봉사 2조를 제안하였다.
982년, 당을 모방하여 2성 6부제를 실시하였다. 송을 모방하여 중추원(국왕 비서 기관)과 삼사(곡식의 출납과 회계 담당)를 설치하였다. 독자적으로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설치하였다.
983년, 12목에 주목을 파견하고,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였다. 983년,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중소 호족들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였다. 995년, 10도를 설치하여 그 아래 주·군·현·진을 두고, 12목을 12군으로 개편하였다.
중앙의 문·무관에게 문산계를 부여하고, 탐라 왕족 · 여진 추장 · 노병 · 공장 · 향리 등에게는 무산계를 부여하여, 중앙의 관계와 향직을 개정하였다.
과거제와 음서제를 정비하고, 문신월과법을 실시하였다.
992년,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987년, 지방에 향학을 설치하며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다. 개경에 비서성을 서경에 수서원을 세웠다.
노비환천법을 실시하였다.
흑창을 확대하여 의창을 설치하고, 개경·서경·12목에 상평창을 설치하였다.
호족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기구를 제작하는 등 권농 정책을 실시하였고, 왕이 친히 왕의 친경지인 적전을 경작하며 농업을 장려하였다. 재해 시 흉작의 정도에 따라 조·공납·역을 면제하는 재면법을 실시하고, 자모상모법(이자가 원금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으로 고리대를 제한하였다.
최초 화폐인 건원중보(철전)를 만들었다.
993년, 거란 1차 침입이 있었다.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몰고 들어왔는데,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압록강까지 국경을 확대하였다.
<목종(997~1009)>
998년, 개정전시과를 실시하였다. (전,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관직만을 기준으로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왕의 공상(진상) 및 친족의 보첩(족보)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전중성을 설치하였다.
보주(지금의 의주)에 각장(무역시장)을 설치하였다.
1009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다.
<현종(1009~1031)>
성종 때 설치된 12목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4도호부’와 일반 행정 구역인 ‘8목’으로 개편하고, 전국을 다시 ‘5도 양계’로 이원화하여 개편하였다.
1009년부터 1029년까지 나성(개경의 외성)을 축조하였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다. 개경이 함락당하였으나 양규가 선전했다.
7대 실록과 초조대장경을 편찬하였다.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이 있었다. 1019년, 강감찬이 귀주 대첩에서 거란 장군 소배압의 침입을 격파하였다.
향리의 공복을 제정하고, 향리의 숫자를 제한하였다.
‘주현공거법’을 실시하여 주와 현을 단위고 향리 자제들에게 과거 시험 응시 기회를 부여하였다.
개경에 현화사(법상종)를 건립하고, 현화사 7층 석탑을 세웠다. 1010년,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의창제를 보완하여 ‘주창수렴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면군금고법’을 실시하여 노부모를 봉양하는 정남의 군역을 면제하였다.
‘목감양마법’으로 전국의 목장에 목감과 노자를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말을 길렀다.
설총을 홍유후,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증하였다.
<문종(1046~1083)>
1049년,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지급한 세습 가능한 토지인 ‘공음전’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1076년, 경정전시과를 실시하였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으며, 무반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고, 분급 대상에 향직도 포함시켰다.) + 현직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였다.
개경에 동서대비원을 설치하여 빈민 환자의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의천이 흥왕사(화엄종)를 건립하였다.
기인선상제를 실시하여 인질적 성격을 약화시켰다.
삼복제(삼심제)를 실시하여 사형수에 대해 세 번 심사하여 판결하도록 하였다.
최충의 문헌공도와 함께 사학 12도가 융성했다.
김양감이 가락국기를 편찬하였다.
남경을 설치하였다.
<숙종(1095~1105)>
이자의 난을 진압한 후 즉위하였다.
의천이 주전도감을 설치하였다. 활구,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주조하였다.
의천이 해동천태종을 만들고 국청사를 건립하였다.
김위제가 남경을 건설하였다.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하였다.
서적포를 설치하였다.
<예종(1105~1122)>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동북9성을 축조하였다. (별무반)
구제도감과 혜민국을 설치하였다.
복원궁을 설치하고, 해동비록을 편찬하였다.
경연을 강화하고,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하였다.
강예재를 포함한 7재를 설치하였다.
양현고를 실행하고, 홍관이 속편년통재를 편찬하였다.
<인종(1122~1146)>
1125년, 금의 군신 관계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자겸의 굴욕 외교)
1126년, ‘십팔자위왕설’을 내세운 이자겸의 난이 있었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반목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후, 정지상의 탄핵으로 척준경도 제거하였다.
1135년,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건원하며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 천도가 어렵게 되자 국호는 대위국, 연호는 천개, 군대는 천견충의군이라 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개경파)가 이끄는 관군의 공격으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경사 6학을 설치하고, 향교를 강화하였다.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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