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의종(1146~1170)>
김관의가 편년통록을 편찬하였다.
정중부의 반란이 일어났다.
<무신 집권기: 명종(1170~1197), 신종(1197~1204), 희종(1204~1211), 강종(1211~1213), 고종(1213~1259)>
1. 정중부 집권기(1170~1179)
1172년, ‘서북 지역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조위총의 난과 연결되었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다.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다.
1174년, 교종 승려들에 의해 ‘귀법사의 난’이 일어났다.
1176년, 망이, 망소이가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공주 명학소의 난’이 일어났다. 공주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면서, 향, 부곡, 소가 해방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 경대승 집권기(1179~1183)
1182년, 주현군(군인)을 중심으로 관노들이 함께 봉기한, ‘전주 관노의 난’이 있었다.
3. 이의민 집권기(1183~1196)
1193년,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일어나서 신라 부흥을 표방하였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편찬하였다.
4. 최충헌 집권기(1196~1219)
도방이 부활하고,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봉사 10조를 제시하고, 흥녕부를 설치하였다
1198년, ‘만적의 난’이 일어났다.
선종 중심 조계종을 지원하였다.
1204년, 지눌이 수선사 결사 운동을 주선하였다.
1216년, 요세가 백련사 결사 운동을 이끌었다.
1215년,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편찬하였다.
1217년, 최광수의 난이 일어났다.
1217년, 제천에서 김취려가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1219년, 강동의 역이 일어났다. (거란의 재침입)
5. 최우 집권기(1219~1249)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대하였다.
진양부에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였다.
본래 치안 업무를 담당하던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분리되었고, 여기에 대몽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신의군이 포함되면서, 삼별포가 조직되었다.
혜심(수선사 2대)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였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고,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ㄷ.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이 있었다. 몽골 장수 살리타가 의주를 점령하였다. 귀주성에서 박서의 저항이 완강하자 몽골군을 병력을 우회시켜 개경을 포위하였고,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1232년, 최우가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골의 2차 침입이 있었다. 김윤후가 처인부곡(처인성, 용인)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소실되었다.
1234년,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으로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1236년~1251년에 재조대장경을 조판하였다.
1236년, 향약구급방을 편찬하였다.
+
1252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휴가 충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254년, 몽골의 6차 침입 때, 충주 다인철소 주민들이 몽골에 대항하였다.
<원종(1259~1274)>
(1260년, 몽골의 침략이 종식되었다.)
1270년,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하였으며,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의 항쟁이 있었다.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다. 강화에서 진도로 이동하고, 일본에 국서를 보내 대몽 연합 전선을 제의한 것은 배중손이다. 이후 제주도로 이동한 것은 김통정이다. 원은 삼별초를 진압하고, 1273년,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
1271년, 녹과전이 실시되었다.
<충렬왕(1274~1298, 1299~1308)>
1269년 원종 때 최초로 설치되었던 전민변정도감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공민왕과 우왕 때 각각 설치되었으나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거나 유명무실화되어 폐지되었다.)
1274년과 1281년에 일본 원정이 있었다.
서경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를 반환받았다.
첨의부 4사와 밀직사로 관제가 격하되었다.
국학을 개칭하고, 섬학전을 마련하였다.
경사교수도감을 실시하였다.
안향의 문묘를 건립하고,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1281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1287년,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편찬하였다.
<충선왕(1298, 1308~1313)>
정방을 폐지하고, 한림원을 사림원으로 개칭하여 왕명 출납을 맡겼다. 사림원 학사(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신진 관료를 등용하였다.
조비 무고 사건으로 원에 압송되었다.
원 무종의 즉위로 심양왕, 고려왕에 복위되었다.
왕실 근친혼을 금지하는 복위교서를 반포하였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을 발표하였다.
원의 수시력이 도입되었다.
성균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하였다.
소금 전매제 실시를 위해 의염창을 설치하고, 각염법을 실행하였다.
요양행성 홍중희의 입성책동 건의가 있었다.
<충숙왕(1313~1330, 1332~1339)>
찰리변위도감을 설치하였다.
정방을 설치하였다.
심왕 고가 입성책동을 건의하였다.
<충혜왕(1330~1332, 1339~1344)>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실시하였다.
기철 등에 의해 원에 압송되었다.
<충목왕(1344~1348)>
이제현의 요구로 응방을 혁파하였다.
정방을 혁파하고,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다. 정치도감을 통해 각 도에 관리를 보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권세가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환원하였다. 권문세족이 경기에 가지고 있던 사급전을 혁파하고, 녹과전을 부활시켜 부담시켰다.
권문세족의 반발로 정방을 재설치하였다.
승려 보우의 임제종 도입이 있었다.
<충정왕(1348~1351)>
1350년, 경인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공민왕(1351~1374)>
기철 및 친원파를 숙청하였다.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였다.
문종 대 관제를 복구하여, 2성 6부제를 실시하였다.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유인우, 철령 이북 확보)
홍건적의 2차 침공이 있어서 안동으로 피신하였는데, 흥왕사의 난이 일어났다.
1357년, 이제현이 사략을 편찬하였다.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재신과 추밀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게 하는 내제추제 제도를 신설하여,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성균관을 정비하여 순수 유교 기관으로 만들고, 과거 삼층제를 실시하였다.
신진 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성계와 지용수가 요동 동녕부를 함락하였다.
요양을 점령하였다.
노국공주를 잃고 자제위를 설치하였다. 자제위 소속인 최만생과 홍륜에 의해 피살되었다.
<우왕(1374~1388)>
1376년, 최영의 홍산대첩이 있었다.
1377년,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
1380년, 진포해전이 있었다.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이 있었다.
1383년, 정지의 관음포대첩이 있었다.
명이 철령위 설치를 요구하고 최영은 요동 정벌을 요구하였으나,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이 편찬되었다.
<창왕(1388~1389)>
1389년,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389년, 폐가입진이 일어났다.
<공양왕(1389~1392)>
1391년, 정도전과 조준의 건의로 과전법이 실시되었다.
이성계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였다.
저화을 발행하였다. (자섬저화고)
1392년,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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