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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22

[공무원 한국사] 무장 독립 투쟁 [무장 독립 투쟁] 국내에서도 1919년 천마산대, 1920년 보합단, 1920년 구월산대 등이 만주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무장 항일 투쟁을 이어 나갔다. 국외에서는 3.1 운동을 계기로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되었다. 북간도(북만주)에 대한 독립군(홍범도, 1919), 북로 군정서군(김좌진, 대한 정의단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고를 받고 북로 군정서로 개칭하였다.), 국민회군(안무, 1919), 군무도독부군(최진동, 1919)가 조직되었다. 서간도(남만주)에는 서로 군정서군(이상룡, 1919), 대한 독립단(박장호, 1919), 광복군 사령부(조병준, 1920),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간도 독립군 부대.. 2020. 4. 15.
[공무원 한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 직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는 대한 국민 의회(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신한 청년당 중심, 국무총리 이승만), 국내에는 한성 정부(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가 있었다. 4월 신한 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 의정원이 구성되었으며, 11일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임시의정원을 주체로 하여, 1919년 9월 11일, 본부를 상하이로 하고, 임시 의정원(입법부), 국무원(행정부), 법원(사법부)의 3권 분립 체제를 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2020. 4. 13.
[공무원 한국사]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 3.1 운동 [독립운동] 1912년,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은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의병과 유생으로 이루어졌으며 복벽주의와 왕정 부활을 추구하였다. 의병 전쟁을 목표로 ‘국권 반환 요구서’ 보내려고 하다 발각되어 해체되었다.1915년, 사령 박상진, 부사령 김좌진을 중심으로 군대식 조직인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의병 출신과 신지식인들도 참여한 이 조직은 근대 공화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만주에 무관 학교를 짓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광복회 실천 강령’에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의 불법 징수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일본인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등의 내용이 있다. 서간도(남만주).. 2020. 4. 12.
[공무원 한국사] 일제의 국권 피탈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 병합 조약) [일제의 국권 피탈] 1903년, 러시아가 용암포와 압록강 하구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하였다. (용암포 사건)1904년 1월, 고종이 대한 제국은 중립국임을 선언하였다.1904년 2월~1905년 9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이 승리하였다. 1. 한일의정서1904년 2월, 러일전쟁 선전포고 이후 바로 한국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한일의정서에는 ‘내정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과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을 것’,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과 정립할 수 없을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일본은 이를 통하여, 대한제국을 러일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제한하였다. 2. 대한시.. 2020. 4. 11.